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 (문단 편집) == 기타 == 1970년대 [[닉슨 행정부]]에서 [[미국]] [[국무장관]]으로 재직하면서 [[중국]]과의 관계 개선, [[소련]]과의 군비 경쟁 제한 등 [[데탕트]]를 실현해낸 '''[[20세기]] 세계 외교계의 거목 [[헨리 키신저]]'''는 메테르니히를 자신의 [[롤모델]]이라고 열렬히 칭송했다. 본인의 [[하버드대]] 박사 학위 논문의 주제가 메테르니히의 [[빈 체제]]였고, 이후 자신의 여러 저작들에서도 존경심을 자주 드러냈을 정도였다. 반면 영국의 역사학자 [[테일러#s-2.1|A. J. P. 테일러]]는 "메테르니히의 소위 '업적'이란 건 일반인들이 면도하면서도 이룰 수 있는 일들이다."라면서 온갖 음험한 정치공작에는 능해도 장기적인 비전이 부재한 전형적인 협잡꾼으로 폄하했다. 이와 비슷하게 현대의 역사학자였던 [[토니 주트]] ^^(1948년 ~ 2010년)^^[* [[루게릭병]]으로 죽었다.]는 헨리 키신저를 욕하면서 그가 메테르니히를 숭상했다는 점을 꼽아내며 "키신저와 같이 자칭 '[[현실주의자]]' 운운하면서 실제로는 정국을 말아 먹는 근시안적 바보들의 원형이다."라 키신저와 덩달아 깐 바도 있다. 나폴레옹 시대를 종결짓는데 지대한 역할을 한 사람답게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유일한 적자 [[나폴레옹 2세]]가 훗날 [[오스트리아 제국]]에 위협적인 존재가 될 수도 있다고 판단해 그를 견제했다. 물론 나폴레옹 2세는 나폴레옹의 아들이지만 자신들의 황제인 [[프란츠 2세]]의 외손자이기도 했기 때문에, 큰 제재를 가하지는 못 했지만 그가 철저히 [[독일/문화|독일식]] 교육을 받도록 했고 [[프랑스어]]를 배우거나 프랑스 책을 읽는 것을 엄금했다.[* 당시 [[프랑스어]]는 현재의 [[영어]]처럼 국제 공용어 역할도 했다. 단순히 아버지 나라의 언어를 금지한 것 뿐만 아니라 타국의 외교관들과도 교류하기 어렵게 만든 것이다.] 이 조치가 지나쳤는지 나폴레옹 2세는 어릴 때부터 우울증 증세를 보였다. [[독일]]에는 메테르니히의 이름을 딴 질좋은 보급형 [[스파클링 와인|젝트]]인 퓌르스트 폰 메테르니히(Fürst von Metternich)[* 해석하면 '메테르니히 [[후작]]'이다.]가 있다. 양조장은 [[헤센]] 주의 [[주도(행정구역)|주도]]인 [[비스바덴]]에 있으며 헨켈(Henkell)[* 쌍둥이 칼을 비롯한 가정용품으로 유명한 헨켈은 Henkel으로 표기한다.]의 자회사이다. 리슬링 품종으로 만든 것과 샤르도네 품종으로 만든 것, 그리고 로제 버전이 있다. 오스트리아의 특산 디저트인 [[자허토르테]]의 탄생과 관계가 있다. 메테르니히가 어느 날 중요한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직속 요리사에게 디저트를 준비할 것을 명령했는데, 그 요리사가 몸이 좋지 않아서 [[도제(교육)|도제]]마냥 밑에서 일하던 요리사의 아들인 프란츠 자허(Franz Sacher)가 아버지를 대신하여 초콜릿 스펀지 케이크를 만들었다. 메테르니히는 "중요한 손님이 입맛을 버려 자신의 명성이 떨어지는 사태가 나면 가만 두지 않겠다."고 단단히 경고했는데, 단단히 긴장한 자허가 내놓은 초콜릿 케이크는 다행히 손님으로부터 호평을 받아 메테르니히도 자허를 칭찬했다고 하며 이후 이 케이크는 그의 성씨를 따서 '자허토르테'(자허의 케이크)라고 불리게 되었다. 프란츠 자허는 훗날 빈에 '카페 자허'를 열어서 정식으로 자허토르테를 만들어서 팔기 시작해 21세기인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자허토르테를 제조 및 판매하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